1. 디지털 경제의 성장과 과세의 공백
21세기 글로벌 경제를 주도하는 축은 제조업이 아니라 디지털 서비스 산업이다. 구글, 아마존, 애플, 페이스북, 넷플릭스와 같은 거대 다국적 IT 기업들은 전 세계에서 막대한 수익을 올린다. 그러나 이익의 상당 부분은 법인세율이 낮은 국가, 이른바 조세회피처(tax haven)에 집중된다. 반면 실제 매출이 발생하는 시장국은 세수를 확보하지 못한다. 기존 국제조세법은 “고정사업장(permanent establishment)” 개념을 기준으로 과세했기 때문에, 물리적 지점이 없는 디지털 기업은 사실상 과세 망을 벗어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각국은 조세 주권이 침해된다고 주장하며 새로운 제도를 요구하게 되었다. **디지털세(Digital Tax)**는 바로 이러한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한 국제사회의 응답이다.
2. 디지털세의 개념과 국제 논의
디지털세는 디지털 플랫폼 기업이 물리적 사업장이 없는 국가에서도 매출이 발생하면 해당 국가에 과세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제도다. 단순히 법인세율을 높이는 문제가 아니라, 국제조세 체계 자체를 재설계하는 혁신적 시도라는 점에서 주목받는다.
국제사회는 OECD와 G20을 중심으로 디지털세 논의를 진행했다. 2021년 136개국이 참여한 ‘포괄적 합의(inclusive framework)’에서는 두 가지 핵심 축이 마련됐다.
- 제1 기둥(Pillar 1): 매출이 발생한 시장국에 과세권 일부를 배분한다. 물리적 사업장이 없더라도 소비·이용이 발생하면 과세가 가능하다.
- 제2 기둥(Pillar 2): 글로벌 최저 법인세율을 15%로 설정한다. 기업이 세율이 낮은 조세회피처를 이용하더라도, 본국이 차액을 추가로 과세해 세율 인하 효과를 무력화한다.
이 합의는 디지털세 도입에 관한 국제적 공감대를 형성했으나, 세부 이행 방안은 여전히 협상 중이다.
3. 국가별 입장과 실제 갈등
- 프랑스: 2019년 매출의 3%를 과세하는 방식으로 세계 최초의 디지털세를 도입했다. 주요 대상은 구글, 아마존, 페이스북 같은 미국계 IT 기업이었다. 이에 미국은 보복 관세를 경고하며 갈등이 격화되었다.
- 영국·이탈리아·인도: 각국은 자국 내 매출에 일정 비율을 과세하는 독자적 디지털세를 도입했다. 그러나 이 역시 미국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 미국: 자국 기업이 집중적으로 타깃이 된다는 이유로 디지털세에 반대한다. 대신 OECD 합의안을 기반으로 다자적 해결을 모색하자는 입장이다.
- EU: 장기적으로는 회원국 공동 디지털세 도입을 추진 중이다. 이는 단순한 세수 확보를 넘어, 글로벌 디지털 경제의 규범을 선도하려는 전략적 성격을 가진다.
- 한국: OECD 논의에 참여하고 있으며, 국내 IT 기업의 부담을 최소화하는 방향에서 세부 설계를 고민하고 있다. 한국은 수출 의존도가 높고 디지털 기업도 성장 중이어서, 글로벌 합의의 향방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 이처럼 국가별 이해가 첨예하게 충돌하기 때문에 디지털세는 국제조세법의 새로운 시험대가 되고 있다.
4. 학문적 논의와 주요 쟁점
학계에서는 디지털세를 두고 몇 가지 쟁점이 활발히 논의된다.
- 과세권 충돌 문제
기존 국제조세 원칙은 ‘사업장이 있는 곳’에서 과세한다는 단순한 기준을 유지해 왔다. 그러나 디지털세는 ‘소비가 발생한 곳’까지 과세권을 확장한다. 이 과정에서 본국과 시장국 간 과세권 충돌이 발생하며, 이중과세 위험을 줄이기 위한 정교한 조정 장치가 필요하다. - 무역 규범과의 충돌
특정 국가가 독자적으로 디지털세를 도입할 경우, 사실상 특정 기업을 겨냥하는 차별 조치가 될 수 있다. 이는 WTO의 내국민대우 원칙이나 차별 금지 원칙과 충돌할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디지털세는 무역법과 조세법의 경계를 넘나드는 새로운 복합 규범 문제를 낳는다. - 세수 공평성과 효율성
디지털세는 과세 공평성을 높이는 수단이지만, 기업의 세 부담을 과도하게 늘리면 투자 유인을 악화 할 수 있다. 따라서 세수 확보와 투자 촉진 사이의 균형이 중요하다. - 글로벌 합의의 필요성
개별 국가가 독자적으로 디지털세를 도입하면 조세 분절화가 심화한다. 학자들은 글로벌 합의 없이는 기업이 이중 규제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고 경고한다.
5. 기업과 국가의 대응 전략
기업 입장에서는 디지털세가 단순한 세금 부담이 아니라 경영 전략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규범 변화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 회계 구조 조정: 글로벌 최저세율에 맞추어 세금 회피 전략을 근본적으로 수정해야 한다.
- 시장 다변화와 가격 전략: 디지털세가 높은 국가에서는 가격 인상 압력이 발생할 수 있다.
- 법률 자문 강화: 디지털세 적용 범위와 절차가 국가별로 다르기 때문에 전문 법률 자문이 필수적이다.
국가 입장에서는 디지털세를 세수 확보 수단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글로벌 디지털 질서에서의 규범 경쟁이라는 시각을 가져야 한다. EU가 디지털세를 통해 규범 주도권을 확보하려는 것처럼, 한국도 글로벌 협의 과정에서 자국 기업의 부담을 최소화하면서 국제적 신뢰를 높이는 방향으로 참여해야 한다.
6. 국제조세법의 새로운 전환점
디지털세는 단순히 조세 제도의 개편이 아니라, 국제경제 질서 전체를 재편하는 제도적 변화다. 전통적인 물리적 사업장 개념은 디지털 시대의 현실을 설명하지 못하며, 시장국의 과세권을 인정하는 새로운 규범이 필요하다. 그러나 국가별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상황에서 국제사회의 협력이 없이는 이 제도의 안정적 정착이 어렵다.
학문적으로 디지털세는 국제조세법과 무역법, 나아가 국제정치경제의 교차점에서 연구해야 할 복합적 주제다. 실무적으로는 다국적 기업과 각국 정부가 모두 새로운 규범 환경에 적응해야 한다. 한국은 디지털 경제의 수혜국이자 무역 의존도가 높은 나라로서, 글로벌 합의 과정에서 적극적인 중재자 역할을 해야 한다.
결국 디지털세 논의는 세수 공평성과 경제 효율성, 국가 주권과 국제 협력 사이의 균형을 찾는 실험이다. 그 결과는 앞으로 수십 년간 국제조세법의 패러다임을 결정하고, 디지털 경제의 지속 가능성을 좌우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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